유럽여행하며 한식(밥) 먹기
유럽 자동차여행의 핵심 –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2002년에 나온 “렌터카 유럽여행” 책에서 가장 극단적인 반응을 받았던 것이 ‘밥 해먹는’ 이야기였다. 밥솥 가지고 다니면서 숙소의 방 안에서 밥해먹으라는 이야기. 그 때 많은 독자들이 “그럴 수도 있군요” 하며 기뻐했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은 “국제망신”이라며 강한 거부감정을 드러냈다.
사실 호텔 객실 내에서 무얼 먹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된다. 고급 호텔에서는 손님이 원하면 객실까지 음식을 날라준다. 미국이나 호주의 호텔/모텔 객실에는 거의 대부분 냉장고와 전자렌지가 갖춰져 있다. 보관할 음식이 있으면 냉장고에 보관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전자렌지에 데워서 먹으라는 것이다.
방 안에서 무얼 먹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내가 먹는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아닐까?
빵은 되고 밥은 안된다는 인식, 곰삭은 치즈 냄새는 향기롭고 곰삭은 된장 냄새는 역겹다는 인식. 이젠 우리의 자긍심도 많이 성장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밥 먹는 문제가 걱정인 사람은 이제 걱정 접어두고 밥을 먹기 바란다.
숯불에 고기를 굽거나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같은 요리가 아니라면, 빵을 먹든 밥을 먹든 양송이 스프를 먹든 오뚜기 미역국을 먹든 누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밥짓기
전기밥솥에 쌀을 안쳐서 밥을 짓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쌀 씻는 것도 매우 간단하지만 그것도 복잡하게 생각되면 한국에서 씻어 나온 쌀을 사가지고 가면 된다. 말 그대로 물만 부어 스위치만 눌러놓으면 나머지 반찬 준비하는 동안 기름이 자르르한 밥은 저절로 만들어진다. 밥 짓는 게 번거롭게 생각되거나 일정이 짧다면 햇반을 가지고 가서 데워먹는 방법도 있다.
냄새
누구나 익숙하지 않은 냄새는 싫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오염된 무엇일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그래서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는 누구에게나 거부감을 주게 마련이다.
유럽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한국음식 냄새가 방에 배이지 않게 신경 써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다. 그러려면 모든 반찬들은 밀폐용기에 담아두어야 하고, 특히 김치 같은 것은 밥 먹기 직전에 뚜껑을 열어서…. 냄새 퍼지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밥 먹을 동안 창문을 활짝 열어두기만 해도 방안에 냄새가 배지는 않는다.
유럽의 도심지에 있는 호텔은 대부분 창문이 잠겨있다. 창문을 열면 바로 아래에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있기 때문에 낙하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창문을 아예 봉해놓는 것으로 짐작한다. 도심의 호텔이라도 건물 뒤편 주차장이나 공터 쪽의 객실은 창문이 열리도록 되어있기도 하므로 호텔 방을 얻을 때 프론트 직원에게 창문이 열리는 방으로 달라고 할 필요가 있다.
손잡이가 잠겨있는 창문도 잘 살펴보면 열 수 있는 방법이 있기도 하므로, 쉽게 열리지 않는다 해도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다. 화장실의 환풍기를 계속 틀어놓아도 밥 먹고 한 두 시간 지나면 방안의 냄새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래도 신경쓰인다면 페브리즈같은 냄새 제거제를 가지고 다니며 사용해도 좋다.
설거지
특별한 요리를 하지 않는 이상 음식 찌꺼기가 나올 건 별로 없다. 밥이든 반찬이든 싹싹 긁어먹으면 그만이지만, 만일 찌꺼기 남은 게 있다면 큰 건 비닐봉지에 꽁꽁 싸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국물은 화장실에 쏟아 버리고 물 내리면 끝난다.
단, 세면대에는 아무 것도 버리면 안된다. 세면대의 배수관 구조는 하단 부분이 U자 모양으로 돼 있어서 찌꺼기가 조금만 쌓여도 막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막히면 손으로 배수 파이프의 나사를 풀어서 머리칼이나 찌꺼기 낀 것을 털어낼 수도 있지만, 그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피크닉 박스, 점심 도시락
한국음식은 반찬 가짓수가 많고 그릇도 종류별로 여러 개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매번 챙겨 들고 다니려면 매우 복잡하고 한 가지라도 빠진 게 있으면 그 때문에 주차장과 방을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그래서 음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한 번에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는 큰 상자나 가방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것은 ‘다이소’같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적당한 사이즈의 플라스틱 밀폐용기다. 먹는 것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이 용기 안에 담아두면 호텔 방 안이든 고속도로 휴게소든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식사 준비를 해서 밥을 먹을 수 있다. 말하자면 피크닉 박스를 늘 들고 다니는 것인데 일반 피크닉 박스와의 차이점은 ‘우아한 대바구니’가 아니라 플라스틱 밀폐용기라는 것 뿐이다.
하나에는 반찬과 몇 끼 먹을 만큼씩의 식재료들을 담고, 다른 한 통에는 밥그릇이나 여러 가지 도구를 담는 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잘 분류해서 가지고 다니면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부엌을 차리고 손쉽게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유럽에서 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햄버거, 케밥,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지만 이것도 매일 먹다보면 물려서 먹기 힘들다.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면 매우 편하고 돈도 들지 않아서 좋다. 도시락 싸는 것은 간단하다. 마른 김을 한 톳 가지고 가서 김밥을 말아도 좋고 주먹밥을 만들어도 좋고, 맨밥에 반찬을 가지고 다녀도 좋다.
어떤 밥이든 가지고 다니려면 밀폐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밀폐용기는 현지의 슈퍼에서도 쉽게 살 수 있으므로 거기서 필요한 것을 사서 쓰다가 가지고 와도 된다. 김밥은 신 김치 한두 줄만 속에 끼워 넣고 둘둘 말면 그만이다. 한국에서라면 이것도 깁밥이냐고 하겠지만, 유럽 여행 다니면서는 이것처럼 맛있고 소중한 음식도 없다. (가서 먹어보면 안다)
길에 서서 밥을 먹는 일
처음 유럽에 갔을 때 무척 생경하고 놀라웠던 광경중의 하나가 ‘길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 때까지 나의 상식으로 길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는 건 거지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럽에 가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밥을 먹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공원 벤치를 차지한 사람은 그래도 양반이고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은 그냥 길가에 서서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손에 들고 우물우물 점심을 먹는다. 그런 모습이 처음엔 무척 생경하고 어색했고,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뒤 여러 차례 여행을 다니면서 차츰 무디어 져서 나도 아무데서나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도시락을 꼬박꼬박 가지고 다니면 식비로 나가는 돈이 거의 없어서 비용도 크게 절약된다. 몸에 좋은 것은 물론이다.